만남과 떠남에서 길목에서 엇갈린 인생들의 변주곡
– 안톤체홉의 《벚꽃동산》
글 – 김은균 (복지tv 기획피디·공연평론가)
■ 만남과 떠남의 길목에서
1903년 체홉이 집필한 《벚꽃동산》은 러시아 귀족 사회가 몰락하고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이 등장하던 시기의 단면을 그린다.
문삼화 연출의 이번 공연은 이 오래된 고전의 숨결을 오늘의 현실로 옮겨왔다. 무대 위에는 화려한 영광 대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대사보다는 침묵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 작품은 결국 인간이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무엇을 잃고 얻는가를 묻는 이야기다.
《벚꽃동산》의 중심에는 라네프스카야 부인이 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 경매 위기에 처한 저택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오빠 가예프는 여전히 이상주의적 허세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고, 하인 피르스는 여전히 옛날의 질서 속에 머문다.
그들의 대화는 지난 시대의 허상처럼 공허하게 메이리 친다.
그들의 귀족적 자존심은 시대의 흐름 앞에서 무너진다.
그러나 그 몰락의 자리에 새로운 이름이 등장한다.
농노의 아들인 상인 로빠힌이다.
그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냉정한 인물이다.
벚꽃동산의 경매에 참여한 그는 마침내 귀족의 집을 사들인다.
과거 주인을 섬기던 계급이 이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로빠힌의 승리는 사회 변화의 상징이자 체홉이 그려낸 신흥 부르주아의 초상이다.
하지만 그의 승리 또한 공허하다. 그는 벚꽃동산의 열쇠를 손에 쥐었으나, 그 안에 깃든 시간의 온기까지는 얻지 못했다.
“내가 이 집을 샀다. 내가, 농노의 아들이!”
그의 외침은 기쁨이 아니라 자기 모순의 울음이다.
그가 손에 넣은 것은 물질 이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온기다.
체홉은 이 장면에서 한 사회의 교체를 차갑게 보여준다.
한 시대의 귀족이 무너지고 또 다른 귀족이 태어날 뿐 인간의 고통은 반복된다.
《벚꽃동산》의 모든 인물은 만남과 떠남의 길목에 서 있다.
라네프스카야는 떠나야 하고 로빠힌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야 한다.
아냐와 뜨로피모프는 새로운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피르스는 그 모든 시대를 배웅한다.
체홉은 이 만남과 떠남의 교차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준다.
삶은 늘 떠남으로 이어지고, 그 떠남 속에서 또 다른 만남이 태어난다.
문삼화 연출의 무대는 바로 이 ‘길목’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대사보다 눈빛이 사건보다 호흡이 중심이 되었다.
하나의 장면이 끝날 때마다 인물들의 시간은 조금씩 닳아가고, 관객은 그 소멸의 속도를 온몸으로 느낀다.
무대의 여백은 공허가 아니라, 인간의 체온이 스며드는 자리였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종말’이 아니라 ‘순환’의 흐름이다.
벚꽃이 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봄을 준비하는 순환의 시간인 것이다.
체홉은 이 단순한 진리를 피르스의 독백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언어로 들려준다.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버렸네.”
그 말 한마디 속에는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모든 인간의 쓸쓸한 존엄이 깃들어 있다.
■ 남겨진 자들과 피르스의 독백
모든 인물이 떠난 뒤, 무대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남는다.
하인 피르스.
그는 세월의 저편에서 홀로 저택을 지키던 노인이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그는 문을 닫지 못한 채 빈 방을 서성인다.
그의 손끝에는 먼지가 쌓이고, 그의 숨결에는 지나간 시대의 냄새가 남아 있다.
피르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버렸네… 아이고, 바보 같은 거… 인생이 다 가버렸어.”
그의 목소리는 시대의 퇴장과도 같다.
체홉은 피르스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는다.
그는 이름 없는 하인이지만, 그 침묵 속에는 인생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피르스의 독백은 한 시대의 문을 닫는 마지막 종소리이며 아울러 다음 시대의 문을 여는 신호탄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끼질 소리와 벚나무가 베어지는 음성은 관객의 가슴을 찢는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한 시대의 종말이다.
벚꽃동산의 향기로운 시간은 그렇게 베어지고, 새로운 세대의 숨결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체홉은 결코 이 변화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에게 세상의 변모는 필연이며, 인간의 삶은 그 변화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번 공연의 피르스는 출구 없는 현대인의 방황처럼 문을 향해 계속 문을 두드린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세상의 출구를 찾으려는 외마디 비명 같다.
문삼화 연출은 이 장면을 통해 피르스의 절망을 ‘움직임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다시 돌아서고, 또 두드린다.
그러다 문을 닫지 못한 채 무대 한가운데 쓰러진다.
그 순간 멀리서 도끼질 소리가 울린다.
벚꽃나무가 베어지는 그 소리, 그 메아리가 무대와 관객의 가슴을 동시에 울린다.
그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다.
한 시대의 봉인, 한 문화의 종말, 그리고 새 세대의 숨결이 태어나는 소리다.
피르스의 쓰러짐과 벚꽃동산의 붕괴는 하나의 리듬으로 맞물린다.
체홉은 죽음조차 절망으로 그리지 않는다.
벚꽃이 베어지는 소리는 또 다른 생명의 예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벚꽃동산》의 중심을 라네프스카야나 로빠힌에게 두지만,
사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피르스다.
햄릿의 진정한 중심이 무덤 속의 묘지기이듯.
벚꽃동산을 관통하는 심장은 바로 피르스의 존재다.
그의 노쇠한 몸과 흐릿한 시선, 그리고 중얼거림 속에는
인간이 세상과 작별하는 마지막 생의 울림이 스며 있다.
피르스는 이름 없는 하인이지만, 체홉은 그를 통해 모든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그의 독백은 한 시대의 문을 닫는 종소리이자,
다음 시대의 문을 여는 미세한 손끝의 떨림이다.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버렸네… 아이고, 바보 같은 거… 인생이 다 가버렸어.”
이 대사는 인간이 남긴 마지막 숨결이자, 체홉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구다.
그는 비극을 연민으로 연민을 깨달음으로 바꾼다.
■ 1990년 소련 말리극단의 충격과 그리고 오늘의 배우들
1990년대 초, 모스크바 말리극단이 내한했을 때 한국 연극계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벚꽃동산》에서 피르스를 연기한 이는 실제로 여든일곱 살의 노배우였다.
그는 그저 자신의 세월을 그대로 무대위에 올렸다.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 중얼거렸던 바로 그 대사,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버렸네… 아이고, 바보 같은 거… 인생이 다 가버렸어.”
그 말이 울릴 때, 한국 연극계는 침묵했다.
그것은 연기라기보다 ‘삶의 마지막 증언’이었다.
그 노배우의 호흡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체홉의 문학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목격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연극은 대부분 중년 배우가 수염을 붙이고 노인을 흉내 내던 시대였다.
그래서 실제 노배우의 출연은 단순한 형식의 파격이 아니라,
연극 존재의 의미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 세대의 이어짐 ― 이제는 원로 배우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
오늘날 한국 연극계에도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올해만 해도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된 배우들은 정재진, 최종원, 이일섭, 기주봉, 이종국 등으로 무게감 있는 원로 배우들이 여전히 무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젊은 연출가들이 이들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무대로 불러 들여야 한다.
분장과 가발로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진실과 무게,
그것이야말로 연극이 지닌 가장 깊은 울림이다.
체홉의 피르스처럼 그들은 이미 인생을 통째로 살아낸 배우들이다.
젊은 연출가가 용기 있게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면,
한국 연극은 다시 한번 진정한 생명력을 회복할 것이다.
무대의 깊이는 기술로 쌓는 것이 아니라 세월로 완성된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장면인 피르스가 문을 닫지 못한 채 쓰러지는 순간,
멀리서 도끼질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는 단순한 마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소리다. 한 시대가 끝나고,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피르스가 서 있다.
■ 체홉의 ‘벚꽃동산’을 오늘날 썼더라면
체홉이 오늘날 작품을 썼더라면, 그 결과물은 아마 《마산시절》에 가장 근접했을 듯 싶다.
체홉은 자신의 희곡을 언제나 ‘코미디’라 명명했지만, 우리 무대에서 그 작품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정조와 인물 해석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번 《마산시절》을 보면서 민주화의 단초를 연 부마항쟁의 비극을 담담하게 그려낸 《마산시절》처럼 비로소 체홉이 의도했던 ‘삶의 희극성’이 제대로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품은 가정교사로, 허술하면서도 정감 있는 몸짓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의 엉뚱한 행동과 순수한 이상은 작품 전반에 유머와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었다.
가문의 회계인 예피호도프(이동준 粉)는 “나는 사랑에 빠진 미치광이”라고 외치는 인물로, 사랑의 실패 속에서도 삶의 덧없음을 익살스럽게 드러냈다. 그는 체홉이 말한 ‘작은 인간의 슬픔’을 우스꽝스럽게 풀어내며, 삶의 우연성과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인물로 작동했다.
샤를로타(문예주 粉)는 자신의 독문학을 전공한 언어적 감각을 바탕으로, “오 고독이여, 존재의 가벼움이여, 먼지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여…”라는 독일어 대사를 통해 철학적 고독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 고독은 무겁지 않았다. 그녀는 마술과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극의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체홉이 의도했던 ‘희극적 호흡’을 완벽히 되살렸다. 특히 샤를로타가 다섯 식구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정적이 되기 쉬운 후반부에 생동감과 리듬감을 더해주며, 무대 전체를 하나의 축제처럼 만들었다.
과거의 샤를로타는 종종 쓸쓸하고 냉소적인 인물로 그려졌지만, 이번 무대의 그녀는 전혀 달랐다. 실없는 농담과 마술, 그리고 유쾌한 몸짓으로 관객을 웃게 하면서도, 삶의 덧없음을 잔잔히 떠올리게 했다. 과거 어떤 공연에서는 샤를로타가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가 백발로 변하는 상징적 연출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샤를로타는 오히려 시간을 건너뛰는 생의 긍정으로 해석되었다.
뿐만아니라 두나샤, 야샤, 피시츠크 등 주변 인물들까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생생히 살아 움직였다. 이들은 웃음과 인간미로 극을 채워 넣으면서 체홉이 본래 꿈꾸었던 ‘모든 인물이 살아 있는 코미디’를 현실로 옮겨놓았다.
결국 이번 공연은 체홉이 남긴 문장의 온도를 되살린 무대였다. 그가 말한 “삶의 슬픔 속에 깃든 웃음”이 배우들의 숨결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났고 그 웃음은 단순한 희극적 웃음이 아니라 삶을 관조하게 만드는 따뜻한 시선으로 남겨졌다.